1970년대 ‘열사의 땅’으로 각인됐던 중동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고 있다.
당시 한국 기업과 노동자가 사막 한가운데 도로와 송유관을 건설하고 항만을 지었다면 이젠 석유 화학제품은 물론 전력, 담수를 비롯해 각종 소비재와 생산 설비를 만들어내는 플랜트 시장이 중동에서 서서히 달궈지고 있는 것이다.
중동 국가가 플랜트 수주에 적극 나선 바탕은 최근 몇 년간 계속된 고유가로 축적한 ‘오일 머니’다.
중동의 산유국은 그간 원유를 팔아 벌어들인 수익에만 의존했지만 원유 자원이 수십 년 안에 바닥을 드러낼 것이 분명한 데다 대체 에너지 개발이 속속 성과를 내면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동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아버지는 벤츠를 탔으며 나는 지금 전용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 그러나 내 아들은 벤츠를 타게 될 것이고 손자는 다시 낙타 등에 있게 될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중동 국가의 최대 경제적 화두는 ‘비(非) 원유’(non-oil)다.
원유에 대한 의존성을 최대한 낮추고 그간 소홀히 했던 제조업의 생산기지가 된다는 복안하에 전력생산, 담수, 건설 등 인프라를 확충하고 산업을 다각화, 장기적으로 성장 기반을 다져야 하는 게 중동 산유국의 최우선 과제다.
또 원유 생산에만 그치지 않고 정제와 석유화학 제품생산 같은 ‘다운 스트림’도 직접 관여하려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각종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인 플랜트를 국내에 유치해 선진 기술을 익히고 자신들이 직접 움직여 보겠다는 것이다.
이란ㆍ이라크를 포함한 걸프연안 8개국이 발주할 건설ㆍ석유가스ㆍ전력ㆍ담수 등 플랜트 사업 규모는 올해와 내년 모두 6천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현재 모두 17개의 산업단지를 운영ㆍ건설 중으로 외국 업체의 플랜트 진출의 각축장으로 떠올랐다.
이미 일본과 이탈리아는 플랜트 시장 선점을 위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터다.
한국플랜트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의 중동 플랜트 수주액은 석유화학 부문을 중심으로 모두 90억달러로 전체 한국 기업의 수주액의 37.2%를 차지했고 전년에 비해서도 7.4% 정도 성장했다.
올해 들어서 중동 플랜트 시장의 비중은 더욱 높아져 지난달 말 현재 전체 플랜트 수주액 64억8천만달러 중 반이 넘는 35억6천만달러에 이른다.
대림산업은 지난달 10억달러 규모의 사우디 폴리카보네이트 플랜트 사업을 수주했고 두산중공업이 이달 초 두바이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공사(11억4천만달러)를 따내는 등 일단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이런 대형 수주 건과 함께 패널, 콘크리트 블록, 건축 내외장재, 의료용품, 포장기계 등 중소형 플랜트 수요도 꾸준히 늘어 한국 중소기업에도 기회가 보인다는 게 KOTRA 중동ㆍ아프리카 본부의 분석이다.
업계에선 올해 중동에서만 수주액이 100억 달러를 거뜬히 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중동 플랜트 시장 진출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프로젝트를 하려면 내부 사정이 밝은 현지 대행업체를 잘 선정해야 하는데 능력있고 신뢰도 높은 이 대행업체를 고르기가 쉽지 않은데다 중동 특유의 불투명하고 신속하지 못한 의사결정 체계가 넘어야 할 장벽이다.
최종 낙찰 하루 전에도 계약이 뒤집어 질 수 있다는 게 현지에 지출한 업체의 경험담이다.
또 서방과 일본 기업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지역이어서 신규 업체의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고 일부 플랜트 핵심 기자재 관련 기술력 면에서 한국 업체가 뒤지는 경우가 있어 수익성이 반감된다는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 불어 닥친 중동의 건설붐으로 인건비가 상승세고 건설 자재가 부족하다는 위험성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플랜트산업협회의 신경철 본부장은 “과거 중동 건설붐 시대에 한국인의 성실성과 공기를 반드시 지킨다는 의지에 대해 중동에서 평가가 아직까지 좋다”며 “이제 고도화한 기술을 적극 중동에 수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해와 올해 중동에서 수주한 대표적인 플랜트 사업.
▲쿠웨이트 방향족 제품생산 플랜트 건설(SK건설. 12.3억달러. 지난해 1월)
▲오만 아로마틱스 플랜트 건설(GS건설ㆍLG상사. 12.1억달러. 지난해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 움샤이프 해양플랫폼ㆍ송유관 건설(현대중공업. 16억달러. 지난해 9월)
▲사우디 폴리카보네이트 플랜트 건설(대림산업. 10억달러. 올해 2월)
▲아랍에미리트연합 제벨알리 M 복합화력발전소(두산중공업. 11.4억달러. 올해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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